생각들

인정이론으로 본 <벌레 이야기>와 <밀양>

교환불가 2015. 4. 27. 19:31

기말과제로 썼던 글. 급하게 하느라 마지막은 밋밋하다.



 인정이론으로 본 <벌레 이야기>와 <밀양>


 

  1. 두 작품에 드러난 인정의 문제


 

  이 청준의 소설을 일컫는 말이 있는데, ‘윤리학적 상상력’이 그것이다. 이 말은 문학 평론가 신형철이 이청준의 작품을 두고 한 말이다. ‘윤리학적 상상력’ 즉 이 단어의 의미는 그의 소설이 윤리학적 의제와 난제를 끌어올리려고 하기 때문에 붙여진 말이다. 그런 면에서 이청준의 <벌레 이야기>와 그 소설을 차용해서 영화로 만든 이창동의 <밀양>은 윤리학적인 의미가 내재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우리가 주로 알고 있는 이 두 작품의 윤리적 문제는 ‘용서’의 문제이다. 두 사람 모두 소설과 영화에서 말하고자 했던 것은 이 용서에 대한 의제였는데, 이 용서란 무엇인가, 그것은 누가 하는 것인가를 화두로 자신의 작품 속에 던져놓는다. 우리가 이번에 배운 인정이론은 제법 이 주제와 맞닿아 보인다. 이 문제를 인정으로 바꿔 본다면, 내가 아닌 누군가가 나의 인정을 대신 인정해줄 수 있는가, 바꿔 말하면 타인이 내게 인정을 받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이에게 인정을 받을 수 있냐는 것이다. 그런데 용서와 인정을 갖은 문제로 볼 수 있을까. 용서와 인정의 관계는 밑의 글을 조금 더 이야기 한 후에 살펴볼 것이다.

 

  일 상생활의 안정된 삶이라는 보편적 권리에 대한 침해와 어머니와 자식의 사랑관계의 훼손, 즉 이 대체불가능성에 대한 침해로 일어난 도덕적 훼손감과 반복되는 인정과 무시의 문제는, 인정이론으로 두 작품의 사건을 타고 올라가보는 것이 의미 있는 것으로 느껴진다. 두 작품은 윤리적 구조문제는 비슷하지만 작품을 이루는 내용과 인물은 다르다. 소설 <벌레 이야기>에서는 ‘나’(남편)가 관찰자 시점으로 사건을 서술하며, 나와 알암이 엄마는 약국을 운영하는 부부이다. 영화 <밀양> 같은 경우는 남편을 잃은 ‘준’의 엄마가 ‘준’이와 함께 남편이 살았던 고향 밀양에 내려오고, 준이 엄마는 피아노를 가르치는 선생님이다. 어느 정도 비슷한 것은 알암이와 준이가 학원(비록 다른 학원이지만)을 다녔다는 것이다. 위에서 말했듯이 근대적 가족적 영위 혹은 평범한 삶이나 그럭저럭 편안하게 살아가기 위해서는 보편적 권리에 대한 상호인정이 필요하다.

 

 

  권 리 인격체들은 동일한 법에 종속됨으로써 서로를 개인적 자율성 속에서 도덕규범들을 이성적으로 결정할 수 있는 인격체로 인정하게 된다. 따라서 미드의 규정과는 달리 헤겔의 규정들이 사회적 권리질서를 설명하는 데 적합한 것은 바로 헤겔의 사회적 권리질서 개념이 관습적 전통의 명백한 권위에서 벗어날 수 있고, 또한 보편주의적 정당화 원칙으로 전환되었다는 점 때문이다. (≪인정투쟁≫p. 215)


 

  < 벌레 이야기>같은 경우는 나의 가정은 그럭저럭 잘 살아가고 있는 반면, <밀양>의 경우 남편을 없다는 이유로 준이 엄마는 주민들이 뒷담화하는 것을 들어야 했지만 그래도 잘 지내려고 노력하고 제법 잘 지내기 시작한다. 하지만 이 보편적 권리의 한 측면인 일상적 삶에 훼손을 가하는 사건이 생겼다. 자신의 아이가 실종된 것이다.


 

 

  2. 용서와 인정의 관계


 

  용 서와 인정은 사뭇 비슷하게 보이는데, 그 이유는 두 개의 운동이 발생하기 위해서는 내 속성(나에 대한 긍정) 혹은 권리에 대한 침해가 일어났을 때 시작되기 때문이다. 누군가 내게 잘못을 했으면 누군가가 내게 빚을 진 것이고 나는 그 빚을 가지고 어떤 것을 할 권리가 생기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운동의 역학관계를 살펴보면 상이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용서와 인정을 각각 이익의 관점으로 보았을 때, 용서는 상대방이 내게 빚진 것을 감면해주는 것인 반면, 인정(투쟁)은 상대방이 내게 진 빚을 감면해주는 것이 아니라 그 빚을 받고자 하는 것으로 파악할 수 있다. 한 예를 들어서 얘기하자면 누군가 내 재산에 대한 침해를 저질렀다면 그 범죄자는 내게 빚(물질적이거나 심리적인 것)을 진 것이다. 이 빚을 아무것도 받지 않고 감면해주는 것이 용서이고, 이 빚을 받아내고자 하는 것이 '인정받고자 함', 즉 '인정 투쟁'인 것이다. '빚을 짐'이라는 시작점에서 둘은 같은 곳에서 출발하지만 그 결과는 달리한다. 그래서 <벌레이야기>나 <밀양>은 용서와 인정의 문제가 복합적으로 섞여있고 두 작품은 결말을 달리한다.


 

  2. <벌레 이야기>의 경우


 

  5월 초. 어느 날 알암이가 학교에서 돌아올 시각이 훨씬 지나도록 귀가를 안 했다. 학원갈 시각이 지났는데도 알암이가 돌아오는 기척이 없었다.

 

 

  아 내는 알암이의 돌연스런 가출이 유괴에 의한 실종으로 확실시 되고 난 다음에도 한동안은 악착스럽게 자신을 잘 견뎌 나가고 있었다. 그것은 아이가 어쩌면 행여 무사히 되돌아오게 될지도 모른다는 간절한 희망과, 녀석에게 마지막 불행한 일이 생기기 전에 어떻게든 저 놈을 다시 찾아내고 말겠다는 어미로서의 강인한 의지와 기원 때문인 것 같았다.


 

  알 암이 엄마(이하 ‘아내’)는 자신의 보편적인 인정, 즉 일상적 삶에 대한 권리도 훼손당한 것은 물론, 자식에 대한 ‘사랑’마저도 침해받는다. 자신의 인정을 훼손한 범인에게는 아무런 연락도 없기에 아내는 인정권리에 대한 어떤 요구도 할 수 없었고 따라서 상호작용도 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알아내를 지탱시켜준 것은 아이가 나타나리라는 희망과 기원이었고, 도덕적 훼손감을 함께 막아주는 인륜적 공동체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공 동체의 구성원들에게 권리 인격체로 인정되는 경험은 개개의 주체가 자신에 대해 긍정적인 태도를 가질 수 있음을 뜻한다. 각 구성원은 각 주체의 권리를 존중해야 할 의무가 있음을 알고 있기 때문에 거꾸로 그를 도덕적으로 사려할 수 있는 행위자로 인정한다. (≪인정투쟁≫p.162)


 

경 찰 수사도 시들해져 가는 눈치였고, 학교 쪽 아이들도 이젠 할 일을 다 한 듯 잠잠해져 가고 있었다. 그새 한두 번 아이들도 이젠 할 일을 다 한 듯 잠잠해져 가고 있었다. 그새 한두 번 기사를 취급해 준 신문이나 방송들도 더 이상 도움을 주려 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이제 알암이의 유괴를 불행스런 미제사건으로 기정사실화해 가고 있는 식이었다. (<벌레이야기>p.143)


 

  하지만 아내의 도덕적 훼손감을 매워주는 공동체의 역할은 시들어져가고 있었고 아내의 심정은 더 절박해졌다. 그때 아내가 요구할 수 없었던 인정을 채워준 것은 김 집사가 끈질기게 요구한 ‘종교’였다.

 

 

  - 우리 구세주 예수님 앞으로 나오세요. 그래서 그분의 사랑에 의지하도록 하세요. 주님께선 모든 힘든 이들의 무거운 짐을 함께 져주십니다. 그리고 모든 상처 받은 영혼들의 아픔을 함께해 주시며, 그것을 사랑으로 치유해 주십니다. 알암이 엄마는 지금 혼자서는 도저히 감당해 갈 수 없는 크나큰 영혼의 상처를 입고 있어요. 애엄마 혼자서는 그 짐을 절대로 감내해 나갈 수가 없어요…….


아내는 알암이가 실종 됐을 때의 김 집사의 설교를 신앙심까지로 나아가지는 않았다. 아이라는 유일무이한 혹은 대체불가능성이 아직은 파괴되지 않았을 것이라는 희망이 있었고 다시 돌아오기를 바랐기 때문이었다. 때문에 아내는 서너 주일 예배 시간을 맞춰 가서 기도도 드리고 헌금도 했다. 이는 단지 아이를 찾으려는 간절스런 소망의 표현이었다. 종교적 관점에서는 신앙심이 없는 것이지만 인정의 문제로 보았을 때는 인정문제가 두드러진다. 권리와 사랑에 대한 무시를 아내는 종교적 행위를 통해서 인정받으려고 했다. 하지만,


 

  - 두고 보세요. 내 언제고 알암이 엄마를 우리 주님께로 인도하고 말 테니까. 알암이 엄마라고 어렵고 마음 아픈 일이 안 생길 수 있겠어요. 애 엄마한테도 언젠가는 반드시 주님의 손길이 필요한 때가 찾아오게 될 거예요. 내 그땐 반드시…….


 

  이 런 김 집사의 예언이 들어맞게 된 것이다. 알암이는 자신이 다니던 학원 옆 건물에서 죽은 채 발견된다. 범인은 알암이가 다니던 학원의 원장 김도섭 이었다. 범인은 법정에서 ‘사형’이라는 판결을 받지만 아내는 이제 희망과 기원이 아니라 원망과 분노와 복수의 집념의 태도로 바뀌었다. 인정을 이익관계로 보았을 때 자신에게 만족스럽지 않은 것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 이유는 엄마와 아이의 사랑이라는 ‘대체불가능성’이 훼손되었기 때문이다.

 

 

  (…) 사랑은 보편화 사고를 금하는 태도라고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내가 나의 감정을 "사랑"이라는 강력한 개념으로 기술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내가 그 사람을 대체불가능한 자로 인식할 때문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대체불가능하다는 것은 그의 다양한 특성들이 형용하기 어려운 독특한 형태로 어우러져 있다는 뜻이다. ( ≪정의의 타자≫중 <사랑과 도덕> p.275)


 

  그 렇게 범인이 잡힌 것으로 아내의 원한은 풀릴 수가 없었다. 아내는 범인을 붙잡은 데 만족하지 않고, 자신이 직접 눈깔을 후벼파고 그의 생간을 내어 씹고 싶어하였다. 아이가 당한 것 한가지로 손목을 뒤로 묶어 지하실에 가두고 목을 졸라 땅바닥에 묻고 싶어하였다.

  당 연하겠지만, 당국은 아내에게 무시에 대한 복수의 기회도 주지 않았다. 그리고 아이의 참사와는 직접 상관이 없는 사람들끼리 범행의 목적과 과정을 추궁하고, 재판에서 그의 죽음을 결정지어 튼튼한 벽돌집 속으로 그를 들여보내 버렸다. 근대적 인정권리는 어느 정도 법에 예속되어 있기 때문에 아내는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 인식의 토대가 광범위하게 제거되자마자, 즉 윤리적 의무가 세계 내적 결정과정의 결과로 이해되자마자 법의 타당성에 대한 전제뿐만 아니라 사회적 가치질서의 성격에 대한 일상적 이해 역시 변할 수밖에 없었다.


  근대의 기본권 목록을 통해 모든 인간의 사회적 위신은 법적으로 동등하게 보호된다. 그러나 권리관계가 모든 차원의 사회적 가치부여를 자신 속에 수용할 수는 없다.(≪인정투쟁≫p. 241)


 

아내의 회복되지 않는 훼손의 틈을 비집고 들어간 것은 이번에도 김 집사였다. 김 집사는 이 무시의 문제를 하나님에게 구원, 즉 인정을 받는 문제로 끌어들이려고 한다. 아내는 처음에 자신이 요구했던 인정요구를 무시한 하나님을 거부했지만, 끝내 김 집사의 끈질긴 설교로 다시 교회를 나가기 시작했다.

 

  알고 보니 아내는 아이의 영혼의 구원을 위해 교회를 찾기 시작한 것이다. 소망과 기도가 온통 아이의 내세의 구원에 관한 것뿐이었다. (<벌레이야기>, p.159)


 

  아 내는 다시 교회를 나간 이유는 아이의 영혼의 구원을 위한 것이었다. 즉 아이의 파괴된 유일무이성을 하나님에게 인정받기 위해서 교회를 나가기 시작한 것이었다. 처음에는 교회를 나간 목적이 육체적인 면에서의 유일무이성을 다시 되돌려 받기 위한 인정요구였다면, 두 번째의 목적은 유일무이한 아이의 영혼의 구원을 문제로 한 인정요구이다. 그러면서 아내는 마침내 서서히 주님의 참사랑을 깨닫기 시작했다. 자신이 느끼기에 아이의 구원을 확신하게 되었다. 그럼으로 인해 아내에게선 범인에 대한 저주와 원망기가 덜해 가는 기미까지 보였다.

 

 

  마침내는 그 주님의 사랑에 자신을 맡기겠노라, 스스로 감사의 눈물을 흘리기까지 하였다. (<벌레이야기>, p.159)


 

  그런 아내를 본 김 집사는 아내에게 이제 죄인을 용서할 수도 있어야 한다고 설득한다. 그러면서 아내는 더 나아가는데, 교도소로 면회를 찾아가 범인에게 직접 자기용서의 증거를 원했다.


 

  면 회를 다녀온 그날부터 아내는 다시 열병 환자처럼 머리를 싸매고 자리에 눕고 말았다. 그리고 멍하니 넋이 나간 눈으로 혼자 고뇌에 시달렸다. 그간의 모든 치유의 효과가 거품이 된 듯 참담스런 절망감이 되살아나 있었다. (중략) 분노도 복수심도 잊어버린 아내는 심신이 온통 절망의 덩어리 그 자체였다. (<벌레이야기>, p.165)


 

  아 내는 죄인의 자기 용서의 증거를 원했지만 그녀의 예상과는 달랐다. 죄인은 이미 아내와 아이를 제쳐두고 하나님에게 용서를 받게 되었다. 아내는 그 이후로 어떤 배신감을 느꼈는데, 그것은 아이와 사랑의 관계인 유일무이성의 훼손에 대한 하나님의 인정이 오로지 아내-아이에게만 해당되는 것인 줄 알았지만, 그 인정에 훼손을 가한 죄인도 포함되어 아내 자신이 요구할 수 있는 대체불가능성이 더 이상 대체불가능한 것이 아니게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즉 인정의 문제에 용서가 개입하면서 인정의 상호작용은 멈추게 된다. 아내는 그 이후 무기력감에 빠지고, 죄인의 사형 당일 라디오를 들은 후 얼마 지나지 않아서 자살을 한다.


 

- 다만 한 가지 여망이 있다면 저로 하여 아직도 고통을 받고 있는 사람들의 영혼에도 주님의 사랑과 구원이 함께 임해 주셨으면 하는 기원뿐입니다. 저는 그분들의 희생과 고통을 통하여 오늘 새 영혼의 생명을 얻어 가지만, 아이의 가족들은 아직도 무서운 슬픔과 고통 속에 있을 것입니다. 저는 지금이나 저 세상으로 가서나 그분들을 위해 기도할 것입니다. 아이의 영혼을 저와 함께 주님의 나라로 인도해 주시고 살아남아 고통 받는 그 가족 분들의 슬픔을 사랑으로 덜어주고 위로해 주십사고…….


 

  3. <밀양>의 경우


 

  < 벌레 이야기>에서 말했듯이 아이의 납치의 문제는 권리와 사랑의 문제라고 말했는데, <밀야>의 문제도 이와 같다. 조금 더 자세히 말하자면, 한 아이의 유괴와 그에 이은 죽음, 아이 엄마의 기독교로의 귀의, 유괴 살인범에 대한 용서 결심, 유괴범 면회, 자신에 앞서 신에게 먼저 용서 받은 사실을 확인한 이후의 절망은 원작과 동일하다. 다만 <벌레 이야기>와 다른 점은 아이가 납치를 당한 이유가 나와 있다는 것이다. <벌레 이야기>같은 경우는 아이가 납치당한 이유가 설명되어있지 않은 반면, <밀양>의 경우는 아이는 돈 때문에 납치를 당하게 된다. <밀양>에서의 범인 또한 <벌레 이야기>와 같이 아이가 다니는 학원의 원장이다. 원장은 학부모들과의 자리에서 우연히 아이(준)의 엄마(이하 강신애)가 땅을 알아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강신애가 집을 비운 것을 기회삼아서 원장은 준이를 납치한다. 하지만 강신애가 가지고 있는 것은 범인이 기대한 것과는 다르게 적은 돈을 소유하고 있었고, 자신의 물적 교환관계가 실패하자 아이를 살해한다. 여기서 범인은 아이를 돈과의 교환수단으로 보는 물화적 태도를 나타내고 있다. 여기서 물화의 개념은 루카치의 물화개념으로만 보는 것은 사건의 진상에 더 가까이 갈 수는 없을 것 같다. 왜냐하면 호네트의 지적처럼 루카치의 물화개념은 한낱 인지적 범주착오를 나타내는 것도 아니고 도덕원칙에 대한 위반을 나타내는것도 아니다. 그러니까 습관 혹은 행동의 형식을 가리킨다. 호네트의 물화개념이 여기서는 더 적절해 보인다. 호네트의 표현을 빌리자면 '인정망각'이 일어난 경우라고 볼 수 있는데, 이것은 인정이 ‘사라졌다’는 의미가 아니라 선재해 있는 인정을 ‘잊고’ 물화된 태도를 보여준다고 볼 수 있다.

  또 다른 점은<벌레 이야기>에서는 아이가 납치당하고 찾는 과정에서 아내가 김 집사를 통해 종교를 접했다면, <밀양> 같은 경우는 아이의 죽음을 목도하고 나서 종교를 접하게 된다는 것이고, 소설에서는 아내는 아이의 영혼의 구원을 위해 교회를 다니는 반면, 강신애는 아이를 잃은 슬픔을 이겨내고자 교회에 나가게 된다. 이창동은 여러 내용 면에서 <벌레 이야기>를 변주해 자신만의 방식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가는데, 여기서는 지금까지 쓴 내용과 결부지어서 언급하려고 한다. 먼저, <밀양>도 <벌레 이야기>와 그렇듯이 용서가 인정의 문제에 개입하게 된다. <벌레 이야기>의 경우 범인이 하나님에게 구원을 받은 지 얼마 있지 않아서 아내는 자살을 한다. 그렇지만 <밀양>의 경우 강신애는 자살을 하지 않고 다른 방식으로 자신 만의 인정투쟁을 한다.

 

 

  1. 몇 명의 교인들이 기도하는 교회당에 들어가 손바닥으로 의자를 두드리며 사람들의 기도를 방해한다.


 

  2. 목사가 신애 집으로 심방 와서 죄인을 진정으로 용서할 수 있는 믿음을 달라고 하자 신애는 어떻게 용서할 수 있느냐고 외친다.


 

  3. 옥외 부흥회 현장에서 목사가 기도하는 도중에 음반 가에에서 훔친 CD의 곡 김추자의 ‘거짓말이야‘를 틀어 기도를 방해한다.


 

  4. 신에 대한 신애의 복수는 자신을 교회로 인도했던 김집사의 남편 강장로를 유혹하여 성관계를 가지는 장면에서 정점을 이룬다. 숲에서 강장로 아래 누워서 그녀는 하늘을 바라보며 “잘 보이냐구”를 외치고 하늘을 노려보며 침을 뱉는다.


 

  5. 도로를 건너다 급정거하는 차 앞에 쓰러져 하늘을 향해 “죽일려면 죽여봐”라고 외치고 하늘을 향해 침을 뱉는다.


 

  6. 김 집사 집에서 신애를 위한 기도회가 열리고 있을 때 신애가 돌을 던져 베란다의 유리창을 박살낸다.


 

  7. 범인의 딸이 폭행당하는 것을 목격하고도 그냥 넘어간다.


 

  강 신애는 신이 멋대로 정한 용서를 인정하지 못하고 투쟁을 하지만 끝내 빚을 받아낼 수 없다. 자신의 신체의 훼손을 가하기도 하고, 종교적인 의례에 어긋나는 행동을 하기도 하며 자신의 범인에게도 나름의 복수(딸의 폭행을 넘어가는 것)도 감행해보지만 신애는 자신의 빚을 다 받아낼 수 없음을 깨닫는다. 그녀는 끝에 이르러 칼로 손목을 자해한다. 하지만 그것은 자기포기에서 오는 자살이 아닌 신에게 대항하기 위한, 자신의 권리를 내세우기 위한 최후의 수단이었다. 그녀는 아직 삶에 대한 애착이 남아있어서 속된 말로 손목을 어정쩡하게 긋는다. 그리고 집밖으로 뛰쳐나와 살려달라고 외친다. 영화 마지막에서 그녀가 머리카락을 자르는 장면과 밝게 비추는 햇빛은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것을 암시한다. 그녀는 자신이 무엇을 해도 상호작용할 없는 신과의 인정투쟁을 내려놓고, 또 신에게서 인정받고자 하는 의지를 포기한다. 그 대신 강신애는 인간에게서 구원을 찾는다. 다시 말하면 그녀는 다시 이 땅에 되돌아와서 훼손된 인정과 자신과 상호작용하는 이들에게서 상호인정을 하고자 한다. 이를 보여주는 것은 영화 전반에도 나왔듯이, 밀양이라는 곳에 와서 잘 살아보자고 한 그녀의 모습과 영화 후반에 그녀가 미용실을 뛰쳐나와서 마주친 옷가게 주인과의 대화, 그리고 신애가 밀양에 온 이후부터 그녀 곁에서 그녀의 도덕적 훼손감을 막아주려고 노력한 카센터 사장 종찬이 마지막 장면까지도 함께한 것을 보면, 그녀의 일상적인 삶과 잘 살아보고자 하는 모습은 제법 겹쳐 보이기까지도 한다.

 

  4. <벌레 이야기>와 <밀양>


 

  < 벌레 이야기>와 <밀양>은 그 결말을 달리하는데, 가장 큰 이유는 종교를 어떤 방식으로 받아들였나는 것이다. <벌레 이야기>의 경우 아내에게 종교의 의미는 자식의 생사를 몰랐을 때 그녀는 아이가 돌아올 것이라는 희망, 그리고 아이가 죽고 난 후 아이의 영혼의 구원이라는 대체불가능성에 대한 인정을 받고자한 것이었다. 그렇지만 <밀양>의 경우 강신애에게 종교의 의미는 아이를 잃은 슬픔을 이겨내고자 하는 것에 있었다. 그래서 <벌레 이야기>에서의 종교는 아이의 영혼의 구원이라는 '대체불가능성'에 대한 인정요구였다면, <밀양>에게 있어서 종교는 아직 범인에 대한 인정요구가 만족스럽지 않은 상태를 보여주고, 슬픔을 이겨내고자 하는 수단이었다.

  그 러다가 두 주인공은 종교를 통해서 두 범인을 용서해주고자 했다. 그러니깐 내게 진 빚을 감면해줘도 괜찮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용서를 해주려고 했지만, 결과적으로는 아직 빚을 아무 이익도 없이 청산해주기에는 두 주인공 모두 다 만족스럽지 않은 것이었다. 이런 구조적인 것에서는 비슷하지만, <벌레 이야기>에서는 다시 한 번 아이의 '대체불가능성'이 무시되었고 <밀양>의 경우 슬픔을 어느 정도 이겨냈던 것이 신에게 무시를 받아서 인정의 문제가 신에 대한 인정투쟁까지 확장되었다. 그래서 <벌레 이야기>에서는 아내의 인정모델이 모두 파괴되어서 자신의 권리를 알리기 위한 '자살'이라기보다는 허무함에서 오는 '자살'로 보는 편이 적절하다. 그에 반해, <밀양>에서의 '자살시도'는 오히려 후자, 즉 자신의 권리를 내비치기 위한 방편으로 보는 것이 적절하다. 또한 자살 이전에도 몇 번의 인정투쟁을 한다. 그렇다면 <밀양>에서는 왜 강신애는 삶을 마감하지 않고 일상으로의 삶으로 복귀하는가. 위에서도 말했듯이, <벌레 이야기>와 달리 종교를 받아들이는 자세가 달랐고 영화 전반부와 후반부에도 나왔듯이 강신애는 남편이 없이 무시되는 자신의 무시되는 삶을 인정받고자 노력하려고 했고 실제로 그랬다. 그녀에게는 아직 살아갈 여지가 남아있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5. 참고자료


 

송태현, 《벌레 이야기에서 밀양으로》, 세계문학비교학회, 세계문학비교연구 25, 2008. 12.

스탠리 찰스,《용서:어떻게 용서할 것인가?》, 두란노, 1999.

악셀 호네트,《물화》, 나남, 2006.

___________,《인정투쟁》, 사월의 책, 2011.

___________, 《정의의 타자》, 나남, 2009.

이청준 《벌레이야기》, 열림원,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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