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고

최승자 - 나 날

교환불가 2015. 8. 29. 22:23

나     날


눈알을 앞으로 달고 있어도

눈알을 뒤로 바꾸어 달아도

약속된 비젼은 나타나지 않고


창가의 별이 쉬임없이 늙어 간다.

치아 끝이 자꾸 바스러져 나간다.

날마다 신부들은 무덤으로 떠나가고

날마다 앞 못 보는 아기들이 한 트럭씩 태어나고

느리고 더딘 미끄러짐이 시작된다.


어둠의 볼륨을 좀 더 높여라.

날마다의 커피에 증오의 독을 조금씩 더 치고

그래 그래 치정처럼 집요하게 우리는

죽음의 확실한 모습을 기다리고


그러나 냉동된 달빛 뚝뚝 떨어져 꽂히고

벽시계 과앙과앙 울리고

스틱을 든 불길한 검은 신사가

마지막 문간에 나타날 때

우리는 허리 짤린 개미떼처럼 황급히 흩어져

습기찬 잠의 굴 속으로 기어내려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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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승자의 시를 읽을 때마다 고개를 저으며, "크~!"라며 감탄사를 연발한다. 이거 정말 미쳤군! 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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